본문 바로가기

해시태그 및 로그 백업

[키르니 - 에티] 너의 곁에 잠시 머물렀던 것 만으로도





    "...잘 있어. 이제 그만 나는 잊어버려."
    "많이 좋아했어, 에티."

    네가 '이런 것'들을 싫어할 것을 알면서도 나는 결국 제대로 된 말 한 마디 하지 못한 채 도망쳐 나왔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바닥이 없는 늪을 달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발이 아래로 푹푹 꺼진다. ...너를 무시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처음 다시 만났던 때에 모든 걸 다 이야기 해주었으면 좋았을까? 그도 아니면, 네가 나를 기억해냈던 그 때에라도. 하지만 그 어떤 순간이었더라도 너무 늦었고, 동시에 너무 이르게 느껴져서 나는 네게 아무런 설명도 할 수가 없었다. 진실을 숨기고 과거의 가면을 쓴 채로 거짓으로나마 네 옆에 머무르는 것은 그만큼 유혹적이고 달콤한 일이었으니까. 돌이킬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는데도.

    가까스로 절벽에 다다라, 고르지 못한 숨을 몰아쉬며 아래를 내려다 본다. 검푸르게 흔들리는 물결이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작게 반짝였다. 기억이 나지 않는 긴 시간 동안 바다는 나에게 하나의 커다란 감옥이었다. 바다에서 태어나게 된 '나'는 그로부터 새로운 숨을 얻었지만, 동시에 나의 폐는 서서히 물이 차올라 속절없이 죽어갔지. 흘러가는 하루하루가 전부 지옥 같았다. 그들은 이제 조금은 놓아주었다 생각한 나의 과거를 끄집어내어 마구 난도질했고, 나는 또다시 운명이 휘두르는 대로 바닷속 깊은 곳에 처박힐 수밖에 없었다. 이제 정말로 무력한 것은 지긋지긋했다. 누군가가 죽어가는 것을 보는 것도 질리다 못해 아팠다.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를 대신... 할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떤 이유가 있건 희생이란 말은 내가 무엇보다 싫어하는 것 중 하나였으니.

    하지만 너잖아.

    네가 그릇이 된다면, 그래서 결국 너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결국 나 역시 삶을 잃어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닻을 잃어버린 배는 어디로 향하게 될까. 구태여 묻지 않아도 답은 너무나도 뻔한 것이었지. 내 사람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 수 있다고 말해오기는 했지만, 그건 너를 구해야 할 때 죽음이라도 각오하겠다는 말이었지 목숨줄을 건네주겠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생각하면서도 이젠 놓을 수 없다는 것만이 유의미한 진실이 되어버렸으니. ...계산은 쉬운 일이었다. 너는, 가야만 한다. 나는 그러지 못하더라도. 함께 길을 잃는 것보다는 그게 나았다.

    그걸 알고 있었으면 거기서 더 욕심을 부리지는 말았어야 했는데.

    숨을 들이마신다. 소금기가 섞인 밤공기가 익숙하고, 또 그리운 느낌을 준다. 절벽 아래에서 파도가 일렁이며 아우성을 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내'가 가야 하는 곳이 어디인지 잊지 말라고 끊임없이 일러주는 듯 하다. ...처음에는 그래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가. 언젠가 각자의 삶을 찾아 흩어질 것이라고는 해도 그곳만이 내가 떠나지 않고 머무를 수 있는 곳이었다.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이들이 함께 있고, 그런 평화로운 미래가 계속될 것만 같은 곳. 불행이란 한순간에 문을 부수고 들이닥쳐 모든 것을 불태워버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때때로 영원히 안주하고 싶은 그런 몽매한 망상을 가지게 했었지.

     그래서일까. 나는 그게 이제 정말로 내 손을 떠나버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미련을 가졌던 모양이다. 너희에게, 너에게.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밖에 없는 것들을 찰나의 순간이나마 쥐어보려고 이렇게 애를 썼으니. 우리가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진작에 끝났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니 이제는 정말로 떠나가야 할 시간이다. 미련이 끈질기게 들러붙는다고 해도, 더이상의 과오를 쌓아올려서는 안되었다. 절벽 끝자락에 아슬아슬하게 몸이 걸린다. 막아줄 울타리 같은 것은 없다. 가지말라고 뻗어줄 손도... 없어야 했다. 나의 삶은 빠질 수 없는 닻이 깊게 박힌 채로 그대로 멈추겠지. 언젠가의 졸업 파티에서 추었던 춤처럼, 

    "안녕, 에티."

    어느 날의 밤하늘에서 함께 했던 비행처럼 바다가 움직였다. 결국엔 여기까지 찾아온 나의 거짓 태양에게. 지금까지 네게 받아온 빛만큼, 딱 그만큼만 환한 얼굴로 마지막 인사를 건네면서.